러시아 해커, 호주 핵심 인프라 정조준…"문제는 '공격 여부'가 아니라 '공격 시점'"
호주 정부와 사이버보안 전문가들이 러시아 해커 조직이 호주의 핵심 산업과 사회기반시설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다며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침해는 발생할지 여부가 아니라 언제 발생하느냐의 문제"라며 기업과 공공기관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국가 사이버 방어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호주 신호국(ASD·Australian Signals Directorate)은 최근 러시아 해커들이 통신망, 에너지 기업, 금융기관, 국방산업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병원 등 필수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ASD는 호주의 국가 사이버 안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위협 정보를 제공하고 대응을 지원한다.
디지털 보안기업 셈페리스(Semperis)의 디지털 보안 책임자인 링컨 골드스미스는 "공포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이제는 공격이 발생할지 말지가 아니라 언제 발생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조직들은 이미 시스템이 침해됐을 가능성을 전제로 보안을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사이버 공격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2021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즈마 시의 상수도 처리시설은 원격 접속 프로그램을 통해 해킹을 당했다. 당시 직원은 마우스가 스스로 움직이며 제어판을 열고 설정을 변경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식수에 투입되는 수산화나트륨 농도가 독성 수준까지 높아질 뻔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전략적으로 겨냥하고 있으며 호주 역시 주요 표적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해킹 조직들은 막대한 자금과 컴퓨팅 자원을 활용해 공격을 고도화하고 있으며, 단순한 금전 탈취를 넘어 사회 혼란과 경제적 피해를 유발하는 것이 목표라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해 러시아 해커들의 공격을 받은 재규어 랜드로버(Jaguar Land Rover)가 거론된다. 공격은 직원 개인의 보안이 취약한 기기에서 시작됐고, 이를 통해 기업 내부 서버에 접근한 해커들은 스마트 공장을 장기간 마비시켰다. 골드스미스는 "피해는 한 기업에만 그치지 않고 공급망 전체로 확산된다"고 말했다.
특히 의료기관은 가장 위험한 공격 대상 가운데 하나다. 병원이나 의료기관이 랜섬웨어 공격을 받으면 환자의 생명이 직접 위협받을 수 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조직이 몸값을 지불하고 복호화 키를 받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인터넷과 사물인터넷(IoT)의 확산으로 공격 표면이 급격히 넓어졌다고 분석했다. 자동차, 냉장고, TV, 농기계 등 수많은 기기가 네트워크에 연결되면서 해커가 침투할 수 있는 경로도 함께 증가했다. 더욱이 상당수 소비자 기기는 해외 데이터센터와 연결돼 있어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오래된 장비와 소프트웨어는 더욱 위험하다. 운영체제 지원이 종료됐거나 업데이트가 중단된 제품은 새로운 취약점이 발견돼도 패치가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공격자들이 최신 보안 시스템보다 관리되지 않는 구형 장비를 우선 노린다고 설명했다.
기업 내부 인증 시스템도 주요 표적이다. 전 세계 기업의 약 90%가 사용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액티브 디렉터리(Active Directory)는 사용자와 기기의 신원을 관리하는 핵심 시스템이다. 골드스미스는 이를 "왕국의 열쇠"에 비유하며 "액티브 디렉터리가 마비되면 직원들은 건물 출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업 운영이 멈출 수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의 확산도 새로운 위험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셈페리스 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직의 74%는 AI가 신원관리 시스템을 겨냥한 공격을 증가시킬 것으로 예상했지만, 관리자 계정이 탈취될 경우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조직은 32%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은 충분한 검증 없이 AI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으며, 약 35%는 AI 계정을 제대로 등록하거나 인증하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에는 기본 관리자 계정을 변경하지 않은 채 운영하던 30여 개의 태양광·풍력 발전시설이 러시아 정보기관 해커들의 공격을 받아 폴란드 전력망 일부가 마비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이 공격으로 겨울철 약 50만 명의 주민이 난방 공급에 차질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제 사이버 보안은 정부나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동차 정비업체 직원이 여전히 지원이 종료된 윈도우 10 PC를 네트워크에 연결해 사용하고 있다면, 해당 시스템이 자동차 제조사와 부품업체를 공격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주 정부는 지난 10여 년간 대학과 방위산업 관련 기업을 중심으로 보안 강화를 추진해왔으며 금융, 보험, 의료, 통신 업계도 대형 해킹 사고를 겪은 뒤 보안 투자를 확대했다. 그러나 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보안 수준이 낮은 협력업체와 중소기업 등 우회 경로를 지속적으로 노리고 있다.
호주·미국·영국·캐나다·뉴질랜드로 구성된 정보공유 협의체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도 최근 기업과 공공기관에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시스템을 점검하고 최신 보안 상태를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 전문가들은 "모든 장비가 반드시 인터넷에 연결돼야 하는지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골드스미스는 "공항 입국 시 보안 검색이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듯 디지털 네트워크에도 이와 같은 보안 체계가 필요하다"며 "그러한 시스템이 갖춰질 때까지는 결국 우리 모두가 국가 사이버 방어의 최전선에 서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