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금인데 왜 못 쓰나”…호주 슈퍼 조기 인출 14억 달러, 제도 개편 논쟁 확산
호주에서 생활비와 주거비 부담을 이유로 퇴직연금인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이하 슈퍼)’을 조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의료비 등 긴급한 사유로 승인된 슈퍼 조기 인출액만 14억 호주달러에 달한 가운데, 주택 구입과 생계 곤란까지 인출 사유를 확대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호주 슈퍼는 고용주가 근로자 임금의 12%를 별도로 적립하는 의무 퇴직연금 제도다. 현재 호주의 전체 슈퍼 자산은 약 4조5000억 호주달러 규모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대형 퇴직연금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국민당 소속 바너비 조이스 의원은 채널7의 아침 방송 ‘선라이즈’에 출연해 현행 슈퍼 조기 인출 기준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보장급여를 26주 동안 받은 사람은 경제적 곤란을 이유로 슈퍼를 인출할 수 있다”며 “생활비가 너무 올라 음식을 살 수 없는 상황 역시 분명 경제적 곤란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조이스 의원은 주거 불안도 슈퍼 조기 인출 사유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리고 자동차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도 심각한 경제적 곤란”이라며 “슈퍼는 결국 근로자 자신의 돈인 만큼,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당사자의 판단을 조금 더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호주세무청(ATO) 규정에 따르면 슈퍼는 일반적으로 은퇴 전까지 인출할 수 없다. 다만 중증 질환 치료, 의료 목적의 이동, 중증 장애에 따른 주택이나 차량 개조, 완화의료, 부양가족의 장례비, 주택 압류나 강제 매각 방지, 말기 질환, 영구적 근로 능력 상실 및 심각한 재정난 등 제한된 상황에서는 조기 인출이 가능하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의료비를 이유로 슈퍼 조기 인출을 신청한 사례는 약 9만3500건에 달했다. 이 가운데 약 3분의 1은 감독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최종적으로 승인된 인출액은 총 14억 호주달러에 이르렀다.
노동당은 슈퍼 인출 범위를 확대하면 은퇴 이후 빈곤과 정부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동당 중진인 타냐 플리버섹 의원은 “주택을 지키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거나 질병 또는 임종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이미 슈퍼를 조기에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플리버섹 의원은 “슈퍼는 근로자가 은퇴 후 빈곤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라며 “나이가 들었을 때 노령연금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호주는 현재 노령연금에 매년 약 700억 호주달러를 지출하고 있으며, 슈퍼 계좌가 없었다면 이 비용은 훨씬 더 커졌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짐 차머스 호주 연방 재무장관도 차기 총선이 4조5000억 호주달러 규모의 슈퍼 제도를 둘러싼 사실상의 국민투표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원네이션이 추진하는 슈퍼 조기 인출 확대가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는 호주의 의무 퇴직연금 체계를 훼손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원네이션의 폴린 핸슨 대표는 저소득 근로자들이 은퇴 후를 위해 돈을 묶어두기보다 당장 생활비와 주택 대출 상환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호주인이 지금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 있고 주택담보대출을 갚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그들에게 지금 자신의 돈을 돌려줘 생활비 부담을 해결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핸슨 대표는 슈퍼 부담금이 사실상 임금 일부를 미래로 미루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 돈은 근로자 자신의 것이며, 임금으로 받을 수 있었던 돈을 희생해 적립한 것”이라며 “많은 사람이 지금 그 돈을 사용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의무 슈퍼 제도가 정부의 노령연금 지출을 충분히 줄이지 못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핸슨 대표는 “슈퍼는 은퇴 이후 정부가 노령연금 전액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됐지만, 많은 사람이 슈퍼를 인출해 사용한 뒤 결국 다시 노령연금에 의존한다”며 “솔직히 말해 전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네이션은 과거에도 슈퍼를 첫 주택 구입 보증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정책을 제안한 바 있다. 다만 슈퍼 자금으로 구입한 주택을 나중에 매각할 경우, 슈퍼에서 투자된 비율에 해당하는 매각대금을 다시 퇴직연금 계좌로 반환하도록 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자유당 내부에서도 의무 슈퍼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앤드루 브래그 자유당 상원의원은 현행 제도가 연방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거나 노령연금 수급자를 의미 있게 감소시키지 못했다며 “호주 연방 출범 이후 가장 큰 공공정책 실패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브래그 의원은 임금의 12%를 근로자가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 펀드 운용사에 의무적으로 맡기게 하는 것은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슈퍼 의무 납부 폐지나 부담률 인하는 아직 자유당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지 않았으며, 당내에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슈퍼 조기 인출 확대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현재의 생계 안정과 미래의 은퇴 보장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생활비 위기와 주택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슈퍼 접근권 확대 문제가 향후 호주 연방 정치의 핵심 경제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